2016년 5월 24일 화요일
눈의 야화 [아사쿠라 다쿠야]~
눈의 야화 [아사쿠라 다쿠야]흰 눈이 세상을 가득 채우던 그날 밤, 나에게만 보이는 신비한 소녀를 만났다현대에 새롭게 태어나는 눈의 전설. 『눈의 야화』“깊은 겨울 밤, 창을 열고 바깥 경치를 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 광경을 어디에 비유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온통 눈이다. 불규칙하게 흔들리면서 시계(視界)를 메우고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눈. 마침내 집들과 담장, 전신주 같은 경치들의 윤곽을 빼앗고, 결국에는 지상과 하늘의 경계조차 지워 버린다. 그런 밤에는 눈이 발하는 신기한 빛이 세계를 비춘다. 때로는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세계로 이어지는 문이 열릴지도 모른다.”(본문 중에서)『4일간의 기적』으로 제1회 대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한 아사쿠라 다쿠야는 그 작품으로 “이 작품을 만난 것 자체에 감사하게 하는 걸작”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뛰어난 주제의식과 문체로 인정받았던 그가 이번에는 현대의 도시에서 새로운 전설을 탄생시킨다. 아사쿠라 다쿠야는 눈 내리는 날 밤에만 나타나는 소녀 유키코를 불러내, 어렵게만 보이는 자아와 삶에 대한 이야기를 서정적으로 풀어간다.소외, 방황하던 어느 날 한 소녀를 만났다고등학교 때, 눈이 내리던 한밤중에 잠시 만난 소녀는 나에게 생명의 근원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나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입시 준비에 정신이 없어지고, 대학에 들어간 후에는 다시 취업을 준비하고 졸업에 곧이어 취직을 한다. 회사에서도 나는 능력 있는 디자이너로서 영업부장의 인정을 받으며 일을 해 나간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자신을 인정해 주는 영업부장은 회사 창립자의 서자라는 소문이 나고, 나의 직속 상사인 제작과장의 견제 대상이 된다. 나는 영업부장의 수하라는 취급을 받으며 내몰리다가 결국 회사를 사직하게 된다. 회사라는 유기체 속에서 사람들이 서로 맺는 관계를 파악하지 못한 채 일만 해온 나는 그저 혼란 속에서 밀려나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인과의 관계 때문에 일자리를 잃게 되고, 회사나 사회라는 조직체가 개인의 집합과는 다른 무엇임을 주인공은 뼈저리게 느낀다. 갈 곳을 잃은 나는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았던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그곳에는 오래간만에 돌아온 나를 어색해 하는 가족이 있을 뿐이다. 내가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가족의 평온도 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책하던 나는, 눈이 내리는 공원에서 다시 그 소녀를 만난다.이어짐, 네가 어떤 존재든 지금 널 만났다는 게 중요해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누구와도 대화하지 못한 채 집안에 틀어박혀 있던 나는 17살 때 만났던 소녀를 다시 만난다. 소녀는 다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지만 나에게는 보인다. 아무리 손을 흔들고 불러 보아도 사람들이 자신을 봐 주지 않을 때의 기분이 어떤지 잘 알고 있는 소녀는 나의 눈에 보임으로써 관계가 맺어지는 순간을 누구보다 기뻐한다. 나는 소녀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확인하려 하지만 소녀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한 생명이 죽으면 빛이 되어 하늘 너머의 거대한 빛을 통과해 정화되고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러므로 과거의 어떤 사람이 지금 나일 수도 있고 나는 다음에 또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있다. 소녀는 어떤 생명이든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반대로 그렇다고 해서 지금 나로서 존재하는 이 순간이 무의미한 것도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언젠가는 죽어서 사라지고 또 다른 생명으로 태어나 다시 살아갈 테지만, 지금 나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나는 흰 눈이 끝없이 내려 세상을 채우는 공간인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며 스스로를 이해하게 되고, 친구의 죽음, 강아지의 죽음, 가츠노 할머니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죽음의 경험을 통해서 소녀가 말하는 생명의 의미에 더 가까이 가게 된다. 나는 소녀에게, 가족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하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맺음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예전에 이유를 알 수 없이 긴장된 관계를 가져야만 했던 직장 동료와도 화해하기에 이른다.흰 눈이 가득 내리는 세상에서 느끼는 관계의 따뜻함예전에 어떤 생명으로 살아 왔고 앞으로 어떤 생명으로 살아가든,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나로서 존재하면서 너와 만났다는 사실이다. 누군가 나를 알아주고 나에게 뭔가 해 준다는 일이 얼마나 고마운가. 그러니까 너를 잃게 되는 숙명을 가졌더라도 그것을 슬퍼하지 않고 너를 만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겠다는 소녀의 말은, 만남의 가치가 점점 더 가볍게 취급당하는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마음 따뜻한 감동을 선사한다. 생명과 죽음의 순환, 나라는 존재와 생명 전체의 관계에 대한 이런 파악은 현실에 대한 이성적인 고민만으로는 도출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다. 민간전승으로 전해져 오는 설녀와 유킨코(눈 오는 날 설녀와 함께 나타난다는 눈의 아이들) 전설을 새롭게 해석한 아사쿠라 다쿠야는 그를 통해 생명과 순환, 순환 속에서 드러나는 자(自)의 존재, 자(自)와 타(他)의 관계를 풀어낸다. 또한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인간관계에 대한 갈등은 이런 고민들을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누구든 느낄 수 있는 현실적인 문제로 만든다. 그렇게 이 작품은 인간이 혼자 단절된 존재가 아니라 모두와 이어져 있다는 믿음, 관계맺음이 주는 따뜻함을 읽는 이의 마음 깊은 곳에 심어 준다. 그것은 현대적인 신앙과는 다른, 민간정승으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오랫동안 이어져 온 믿음만이 줄 수 있는 삶에 대한 긍정일 것이다.그리고 그것이 ‘눈’이라는 아름다운 매개체를 통해 드러난다는 점도 이 작품의 큰 특징이다. 주인공에게 흰 눈이 세상을 가득 채운 세계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색채를 모두 벗겨냈을 때 만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며, 그것은 또한 소녀와 나를 만날 수 있게 해 주는 매개체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눈이 가진 “하나하나가 모두 다르지만 결국 그 모두가 눈”이라는 특징은 개인과 전체의 관계를 좀 더 분명하게 그릴 수 있게 해 준다.이 소설의 백미는 역시 눈이 내리는 장면이다. 소녀와 처음 만나던 날, 시계를 가득 채우며 하늘바닥에서 솟아오르던 눈. 보고 있으면 내 자신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 느끼게 하는 눈. 무수한 유킨코들이 내뿜는 빛과 쏟아져 내리는 눈이 어우러져 세상을 가득 채운 가운데 소녀와 내가 이별하는 장면은 이 소설의 압권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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